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로버트 젠킨스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940년 2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다. 체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젠킨스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거한으로 공장 노동자로 일했는데 평상시에는 근면한 노동자였지만 술에만 취하면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흑인 직원들에게 총을 쏘고''' 공장 사장이 이를 꾸짖자 제빙공장 전원을 통째로 내려 공장을 작살내는 등 통제불능의 인물이었다. 젠킨스 부부의 자녀가 무려 일곱이나 되었기 때문에 어렵게 살았고 아버지가 제빙공장 파이프를 수리하던 중 지나치게 많은 암모니아를 흡입하여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어떻게든 집안을 꾸리려고 노력했고 트럭 운전사와 재혼하였는데 다행히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라서 젠킨스 일가를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젠킨스는 학업에는 영 소질이 없었고 기계를 만지는 일에 능했는데 평소에 자주 놀러가던 스케이트장에서 제복 입은 군인들을 보고 군인이 되고 싶어서 15살인데도 불구하고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주방위군 육군에 입대, 119보병연대 D중대에 배치됐다. 이건 젠킨스의 집안이 어릴 때 정식으로 젠킨스의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서 공식 생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동의서만으로 입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에 사고를 치고 혼나면서 군대 생활이 맞지 않는다고도 여겼지만 익숙해지면서 꽤 즐거운 군생활을 보내게 되었고 3년간 주방위군으로 복무하였다. 근무성적이 좋아서 부사관으로 진급하였으나 중사 진급은 실패했는데 승진 심사위원회에서 적전 도주하는 부하를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과거에 포트 잭슨에서 교육받은 대로 설득해서도 듣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된 걸로 보인다고. 1958년에 주방위군 복무기간이 끝난 젠킨스는 주방위군에서 전역한 후 연방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연대 제19대대 B중대 훈련소에 보내졌다. 이미 부사관으로 수년을 복무한 젠킨스에게 훈련은 너무 시시했고 훈련소에서도 그가 딱히 훈련받을 게 없다고 여겨서 운전수 보직을 주고 편하게 있었다고 한다. 훈련기간이 끝난 후 뉴저지주 포트 딕스로 가서 상급 훈련을 받은 후 텍사스의 포트 후드에 주둔한 제1기갑사단 "올드 아이언사이즈"에 배치되었다. 거기서 사격 훈련장 관리계로 배치되어 사격장 표적을 만드는 목공 일을 하는 등 적성에 맞는 임무를 맡았으나 생각보다 시시한 임무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상병으로 진급하고 1960년 9월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한국에 파병되었다. 캠프 카이저에 주둔한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미국)|제7사단]] 제17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근무 성적이 좋아서 1961년 2월 4등 특기관으로 진급되어 6월에 진급하였다. 한국에선 1년만 근무하고 다시 주독미군에 배치되었다. 이후 [[서독]]에서 3년간 근무하고 다시 근무지 재배치 시점이 되자 과거 주한미군 근무가 너무 재밌었기 때문에 한국 재발령을 희망하여 다시 주한미군으로 보내졌다. 1964년 9월 [[제1기병사단]] 제8연대 제1대대 C중대에 배치되어 분대장이 되었다. 그런데 상부로부터 북측을 도발하기 위한 '헌터킬러' 정찰대를 인솔하라는 '요청'을 받게 되자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서 계속해서 거절했으나 조만간 요청이 명령으로 바뀔 것으로 여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의정부에 주둔한 1군단에서 일하던 먼 친척뻘인 조지프 젠킨스와 만나게 되었는데 조지프 젠킨스는 고향 얘기를 해 주더니 제1기병사단이 곧 베트남에 갈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당황한 젠킨스는 베트남에 가거나 헌터 킬러 정찰대 인솔 명령을 거부하여 군법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생각에 극도의 공포감에 빠지게 되었다. 젠킨스는 이를 피하려면 [[탈영]]밖에 없다고 여겼지만 남한으로 탈영해 봤자 금방 체포되어 인계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여겼고 남은 선택지는 [[월북]]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1965년]] [[1월 5일]]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는 게 두려워서 10여 캔의 [[맥주]]를 마신 후 만취하여 휴전선을 돌아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군사분계선|휴전선]]을 넘었다'''. 정작 해당 부대는 [[베트남]]에 파병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계속되는 실전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여론을 씹고 계속해서 군사를 파병한 데다 이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자 나중에는 파병 사실을 일부 숨기거나 축소해서 밝히는 병크까지 벌인 탓에 군인들 사이에서 언제든 자신들도 파병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젠킨스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니다. 또 베트남 전선에서의 생존율도 높지 않았으며 설령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극심한 [[PTSD]]에 시달릴 가능성도 매우 컸다.][* 실제로 미국은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파병하려고 했지만 한국은 절대로 반대했고 주한미군 대신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한국군|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전쟁이 격하되고 국내여론도 나빠지게 되면서 미군은 보내는 것보다 한국군을 파병시키면 미군의 희생도 줄이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걸 민주주의 국가 모두가 원하다는 식으로 [[프로파간다]]로 쓰기 좋다고 판단하였다.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 파병 비용을 전액 미국이 부담하고 파병 물자를 한국에서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냉전]] 당시 [[서독]]에서 [[소련군]]과 대치 중이던 [[미군]]들 중 일부가 전쟁이 진행 중이던 [[베트남]]으로 차출되어 죽는 것이 두려워서 [[탈영]]하여 [[국가인민군]]에 잡혔고 [[동독]]은 이들을 [[소련]]에 넘긴 사례가 있다. [[소련군]]은 나중에 이들을 [[미군]]에 잡혀 있던 [[소련]] [[스파이]]와의 교환용 협상물로 사용하였고 [[탈영병]]들은 그렇게 귀국하여 징역형을 받았으나 그래도 전쟁터에서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젠킨스도 그리 생각했고 자신도 [[탈영]]하면 '''[[북한]]이 자기를 소련에 넘겨주고 소련에서 다시 미국으로 송환할 줄 알고''' 국경을 넘었다. 즉 본인과 비슷한 시기에 탈영했던 [[드레스녹]]과 달리 애초에 북한은커녕 [[공산권]]에서 살 생각 자체가 없던 인물이었다. 탈영죄로 좀 썩고 불명예 전역이나 하고 고국에 돌아와 조용히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